해방촌 이태원의 유래
용산구의 대표적인 번화가로 외국인, 외국상품, 외국문화의 만남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태원 클라쓰 드라마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곳이지만 팬데믹과 이태원 참사, 용산 미군기지 이전 등으로 쇠락하기도 했다.
이태원은 상대적으로 프랑스인이 많이 사는 서초구 서래마을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다문화 거리 중 하나다. 과거 미8군사령부(일명 용산미군기지)와 인접해 있어 주한미군 유흥가로 발전했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재창조한 덕분에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관광지로 발전했다. 확산 .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고 쓴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로 세 번만 바뀌었다. 조선 초기에 “매화나무 李”는 “李泰院”로 표기 → 임진왜란 이후 “異胎院” →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로 글자와 뜻이 바뀌었다.
원래 이태원은 내가 서울 밖에서 처음 만난 곳이었다. 서쪽에 홍제원. 보제원 동쪽.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주변의 중요한 제1군이었다.
이태원은 이제 용산고 부지에 있었다.
이태원의 역사를 보면 이 나라의 슬픈 역사가 생각납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나오면 예상대로 조선시대 ‘두 개의 큰 일곱 조랑말’ 선조와 인조가 등장한다.
아시다시피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카(소소행장)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부대가 경쟁적으로 진출했고,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동대문에서 남대문과 유키나카 부대를 침공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사적 제1호로 지정했고, 결국 이 문들은 국보 제1호가 되어 현재는 보물 제1호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타고 급히 복원된 남대문이 국보 1호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어떤 학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찬사로 합리화하기도 하는데…)
한양에 입성한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하고 있다.
주둔 중 ‘가등청정과부대’는 여성들을 성폭행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에 주요 타깃은 이태원 황학골 ‘운정사’에서 탈출하지 못한 여성들과 비구니들이었다.
천주교이자 반전 상인인 소행장과 불교인이자 장수인 가등청정은 일본의 라이벌이었다.
오히려 불교 신자인 가등청정이 비구니를 성폭행하고 운정사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사찰이 사라진 후 일제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비구니들의 자녀들과 부인들이 아이를 낳고 유치원을 지어 정착하게 된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여성, 임진왜란 때 강간당한 여성,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이에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 포로, 귀화 일본인들을 한곳으로 모아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로 만들었다. 여기는 이태원
그리고 칠푼이 2인조입니다. 병자호란 때 납치되었던 많은 부녀자들과 그 자녀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이곳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배가 많은 곳’이라는 뜻의 ‘梨泰院'(梨泰院)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국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에는 많은 군부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사기지로 사용되었고,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물면서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임오군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는 1882년부터 1984년까지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 조선군 사령부가 주둔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근대적 촌락이 형성되었다.
해방 후 미군이 이곳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태원 업무지구는 사실상 미군이 장악한 곳이었다.
1957년 미군의 외출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만들어졌다. 1970년대 이태원에 미군기지 상품 상권이 형성되었고 이후 미군기지 유흥가로 재탄생하면서 미국식 군사기지와 클럽이 속속 등장했다.
한편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주변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 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거단지를 짓고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여러 나라의 대사관이 이태원 일대에 많이 이전했고, 그 결과 1970년대까지 고급 주거단지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이태원 유입이 늘면서 오두막과 별장이 공존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탄생했다.
거점도시 단속으로 퇴폐적 업소가 사라지면서 ‘이태원’은 경리단길과 함께 대한민국의 이국 땅이 된다.
왠지 친해질 수 없는 이방인 같은 도심, 이태원… 그 이면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이태원에서 쇼핑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난 잘못한게 없는데 코로나를 간신히 버텼는데..
요즘은 코로나 평일보다 주말에 사람이 많지 않아 정말 힘들다고 합니다.
정부 대책은 없고 이태원만 싸우고,
결국 강남, 홍대 등 주요 지역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가게 주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가게의 임대료와 유지비는 주인이 직접 부담해야 합니다.
코로나 겨우 버텼는데도 이제 진짜 닫아야지
이태원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한숨만
에야디야. 그만큼..
진도에 세월호 참사 때 모두 외면한 팽목항만 있는 것이 아니듯,
이태원만이 길이 아니다..
예전같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애도하고 감사하며 더 좋은 모습으로 사랑했던 추억 이태원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자.

